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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보라카이에 세 번째로 발을 디디면서 그냥 예쁜 바다나 실컷 보다 오자는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나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바다를 되살리기 위해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환경세, 입장료 300페소가 만들어낸 변화
말라이 선착장에서 표를 끊는데 300페소가 나왔습니다. 여기에는 환경세(Environmental Fee)가 포함되어 있는데, 환경세란 관광지 입장객에게 부과하는 일종의 생태 보전 부담금으로 섬의 유지·보수와 자연 복원 재원으로 직접 쓰입니다. 보라카이는 2005년부터 이 제도를 시행했으니 20년 가까이 이어온 셈입니다.
처음에는 '입장료 치고 비싸지 않나' 싶었는데, 막상 섬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해변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일회용 쓰레기 반입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해변에서 음주도 할 수 없고, 여러 행동 제한이 명확하게 표지판으로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관광지에 규제가 이렇게 많아도 되나 싶었지만, 그 규제들이 지금의 청록빛 바다를 지키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필리핀 관광부(DOT) 자료에 따르면 보라카이는 2018년 폐쇄 이전까지 연간 20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필리핀 최대 관광지였습니다(출처: 필리핀 관광부). 그 많은 방문객이 남긴 오염의 결과가 섬 폐쇄였고, 지금의 환경 규제는 그 경험에서 나온 교훈입니다.
생태계 회복, 바다에서 직접 확인한 것들
해변을 걷다가 무언가를 건져 올리는 현지 가이드를 만났습니다. 손에 든 건 왕관불가사리(Crown-of-Thorns Starfish)였는데, 이 녀석은 산호초를 뜯어먹어 해양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침입종입니다. 쉽게 말해 바다의 해충 같은 존재로, 방치하면 산호초 군락 전체를 초토화할 수 있습니다.
그 가이드는 자신이 공인 인명구조원(Licensed Lifeguard)이면서 동시에 왕관불가사리 제거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잡아서 없애는 게 전부라고 했는데, 담담한 그 말이 오히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유명한 포인트에서 찍은 인증샷 한 장보다, 이런 장면 하나가 보라카이의 진짜 모습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호초 복원과 함께 어종도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제가 푸카 쉘 비치(Puka Shell Beach) 근처에서 만난 현지 주민은 갑오징어를 갓 잡아 들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오염이 심해서 해안 가까이에서 물고기를 거의 잡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바다가 살아 있다는 가장 솔직한 증거였습니다.
보라카이 생태 회복 이후 해양 생물 다양성이 유의미하게 회복되었다는 점은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을 비롯한 국제 환경 기관들도 주목하고 있는 사례입니다(출처: IUCN).
지속가능관광, 전기 트라이시클이 말해주는 것
트라이시클(Tricycle)은 오토바이에 사이드카를 붙인 필리핀 특유의 이동 수단입니다. 예전에도 몇 번 탄 적 있어서 익숙한 소리와 냄새를 기대했는데, 보라카이에서 탄 트라이시클은 달랐습니다. 엔진 소리가 없었습니다. 전기 트라이시클(E-Tricycle)로 교체된 것인데, 전기 트라이시클이란 내연기관 대신 전기 모터로 구동되는 친환경 교통수단으로, 대기오염과 소음을 동시에 줄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건 개인 사업자가 자발적으로 바꾼 게 아니라 정부가 주도해서 추진한 정책입니다. 관광 수익에 의존하는 섬이니 환경 문제는 곧 경제 문제라는 판단에서 나온 전환이었을 겁니다. 제가 직접 타보니 진동도 적고, 이동하면서 주변 소리가 잘 들려서 오히려 더 여유롭게 섬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지속가능관광(Sustainable Tourism)이란 관광 활동이 자연환경과 지역 공동체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경제적 이익은 유지하는 여행 방식을 뜻합니다. 보라카이의 전기 트라이시클 전환은 그 개념을 정책으로 실현한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보라카이가 잘 알려진 관광지임에도 이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2018년 폐쇄라는 극단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잃어봤으니까 지키려는 의지도 생긴 것이겠죠.
화이트 비치에서 푸카 쉘 비치까지, 실제로 느낀 것
화이트 비치(White Beach)는 보라카이를 처음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향하는 곳입니다. 3km에 걸친 새하얀 모래사장과 에메랄드빛 수면이 이어지는 이곳은 여전히 압도적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들어갔을 때 물이 예상보다 훨씬 따뜻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열대 바다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몸으로 느끼는 그 온기는 또 다른 감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트라이시클 기사 분이 푸카 쉘 비치를 추천해줘서 거기도 다녀왔습니다. 관광객보다 현지인이 많은 조용한 해변이었는데, 솔직히 화이트 비치보다 더 좋았습니다. 예전에는 유명한 곳만 찾아다녔는데, 이제는 그런 한적한 공간이 주는 여유가 더 필요하다는 걸 여행을 거듭할수록 느낍니다.
보라카이에서 환경 보호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걸 느낀 순간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입장 시 환경세 포함 티켓 구매 의무화
- 해변 일회용품 반입 금지 및 음주 금지 표지판
- 왕관불가사리 자체 제거 활동을 이어가는 현지 자원봉사자
- 섬 전체 전기 트라이시클 전환 운행
- 바다 오염이 줄면서 다시 시작된 근해 어업
부들 파이트(Boodle Fight)라는 필리핀 전통 식사 문화도 잠깐 경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나나 잎 위에 밥과 여러 음식을 펼쳐놓고 손으로 함께 먹는 방식인데, 처음 보면 어색하지만 그 안에 담긴 공동체적 정서가 느껴졌습니다. 보라카이가 환경을 지켜내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주민, 관광객, 정부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에서요.
보라카이를 다시 찾을 계획이 있다면, 화이트 비치만 보고 오기보다는 섬이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지를 함께 들여다보시길 권합니다. 환경세가 어디에 쓰이는지, 전기 트라이시클이 왜 생겼는지를 알고 보면 그 파란 바다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자연이 회복된 풍경을 소비하는 여행이 아니라, 그 회복에 함께하는 여행이 된다는 느낌이랄까요. 다음에 보라카이에 간다면 저는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천천히 머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