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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이슬람 왕조가 스페인 땅을 지배한 시간입니다. 처음 이 숫자를 들었을 때 솔직히 실감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직접 안달루시아 땅을 밟아보니, 그 800년이 골목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유럽인 줄 알고 갔다가, 어느 순간 중동 어딘가에 서 있는 기분이 드는 곳. 그게 스페인 안달루시아였습니다.
알카이세리아 — 비단과 향신료가 오가던 이슬람 시장의 뒷골목
인천에서 13시간을 날아 마드리드에 내린 뒤 다시 7시간을 차로 달렸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그라나다였는데, 시차에 찌든 몸을 이끌고 처음 찾아간 곳이 도심 안쪽 골목에 자리한 알카이세리아(Alcaicería)였습니다. 여기서 알카이세리아란, 알 안달루스 시대에 조성된 이슬람식 전통 시장을 가리키는 말로, 현재 스페인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이슬람식 시장입니다. 제가 직접 걸어봤는데, 좁은 골목 양옆으로 아치형 장식과 천막이 이어지는 풍경이 영락없이 중동의 바자르(bazaar) — 이슬람권의 재래시장 — 를 연상시켰습니다.
당시 이 시장은 지중해 무역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온 비단과 동방의 향신료, 북아프리카의 황금, 베네치아 상인들의 직물이 한데 모이던 국제 교역로의 중심지였으니, 지금 눈앞에 보이는 소박한 기념품 가게들 아래에 그 어마어마한 시간이 묻혀 있는 셈입니다. 가게 안을 들여다보면 지금도 찻잎과 그릇, 물담배 같은 아랍풍 물건들이 가득합니다. 그때 느낀 건, 이건 그냥 관광 상품이 아니라 수백 년 전 상인들의 생활 방식이 형태만 바꿔 이어지고 있다는 감각이었습니다.
골목 곳곳에는 말발굽 모양의 아치 — 이슬람 건축의 대표적 특징으로, 반원을 넘어 더 둥글게 휘어진 형태를 가리킵니다 — 와 기하학 문양으로 장식된 타일 문이 남아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그라나다 역사지구(출처: UNESCO World Heritage)의 일부로, 이 시장 자체가 살아있는 역사 현장입니다. 카페 대신 테리아(tetería)라 불리는 아랍식 찻집이 자리를 잡고 있고, 사람들이 천천히 차를 홀짝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여기가 유럽인지 한순간 헷갈릴 정도였습니다.
- 알카이세리아: 스페인에 현존하는 유일한 이슬람식 전통 시장, 알 안달루스 시대 지중해 교역의 핵심지
- 말발굽 아치(Horseshoe Arch): 이슬람 건축의 상징으로, 골목 문과 건물 입구 곳곳에 남아 있음
- 테리아(tetería): 아랍식 찻집. 유럽의 카페 문화와 대비되는 이슬람 생활문화의 흔적
- 비단·향신료·황금·직물: 중세 지중해 무역의 4대 품목이 모두 거래되던 국제시장
알함브라와 코르도바 — 나스르 왕조가 지상에 새긴 마지막 낙원
시장을 빠져나와 언덕 위를 올려다보면 붉은 성채가 시야를 가득 채웁니다. 알함브라(Alhambra). 아랍어로 '붉은 성채'라는 뜻입니다. 알 안달루스의 마지막 왕조인 나스르 왕조(Nasrid dynasty) — 1230년부터 1492년까지 그라나다를 지배한 이슬람 왕조 — 가 쇠퇴의 끝에서 완성한 건축물입니다. 궁궐 내부 관람 인원이 30분당 300명으로 제한되어 있어 사전 예약 없이는 들어갈 수조차 없을 만큼 경쟁이 치열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최소 두 달 전에는 예약을 마쳐야 할 정도입니다.
내부로 들어서면 아라야네스 중정(Patio de los Arrayanes)이 먼저 펼쳐집니다. 거울처럼 고요한 수면 위로 주변 건물이 그대로 반영되는 이 공간은, 과거 사신들과 귀빈들이 왕을 알현하기 전 마음을 가다듬던 대기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사진으로 수십 번 봤음에도 막상 그 앞에 서면 입이 다물어지질 않습니다. 연못 가장자리를 따라 심어진 푸른 관목은 이슬람 세계관에서 천국을 상징하는 식물로, 건축 하나하나에 종교적 의미가 촘촘히 담겨 있습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사자의 중정(Patio de los Leones)이 나옵니다. 중앙 분수를 떠받치고 있는 12마리 사자는 이슬람 낙원의 네 강을 상징하는데, 이슬람 건축에서 궁전이란 단순한 생활 공간이 아니라 천국의 모습을 지상에 구현한 공간으로 여겨졌습니다. 벽면을 가득 메운 아라베스크(arabesque) 문양 — 식물과 기하학 형태를 반복적으로 조합한 이슬람 특유의 장식 양식 — 은 보는 것만으로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만듭니다. 스페인의 작곡가 프란시스코 타레가가 이곳을 방문하고 받은 인상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곡으로 남긴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라나다에서 차를 달려 북쪽으로 향하면 코르도바(Córdoba)가 나옵니다. 711년 우마이야 왕조(Umayyad Caliphate) — 이슬람 세계 최초의 세습 칼리파 왕조로, 스페인에 진출하며 알 안달루스의 시작을 열었습니다 — 가 진출하면서 알 안달루스의 중심 도시가 된 곳입니다. 과달키비르강을 가로지르는 로마교(Puente Romano)는 1세기 로마 제국 시대에 처음 세워진 뒤 이슬람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위를 걷고 있으니 로마와 이슬람, 중세 유럽의 시간이 발밑에서 겹겹이 쌓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리 위에서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기부금을 받으며 무료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사를 만나 저도 코르도바의 기억을 한 장 남겼는데, 그 즉석 사진이 어떤 기념품보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코르도바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이슬람의 수학·의학·천문학 지식이 이곳을 통해 유럽으로 전파된 역사적 사실은 출처: Encyclopædia Britannica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거리를 걷고 건물을 보면서 깨달은 것은, 문화의 충돌이 아니라 문화의 축적이 이 도시를 만들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알함브라 궁전 예약은 얼마나 일찍 해야 하나요?
A. 제 경험상 최소 두 달 전에는 예약을 마치는 것이 안전합니다. 궁궐 내부 관람 인원이 30분당 300명으로 제한되어 있어 성수기에는 예약이 순식간에 마감됩니다. 공식 알함브라 홈페이지에서 직접 예약하는 방법이 가장 확실합니다.
Q. 알 안달루스가 정확히 뭔가요?
A. 알 안달루스(Al-Andalus)란 711년 우마이야 왕조가 스페인에 진출하면서 시작된 약 800년간의 이슬람 통치 시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라나다가 마지막 수도였으며, 1492년 가톨릭 왕조에 함락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안달루시아라는 지역 이름 자체가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Q. 그라나다와 코르도바 중 어디를 먼저 가는 게 좋을까요?
A. 마드리드에서 내려온다면 코르도바를 먼저 들른 뒤 그라나다로 이동하는 루트가 이동 동선상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알함브라 예약 날짜에 맞춰 일정을 조정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중요합니다. 저는 그라나다를 먼저 갔는데, 알함브라 예약이 일정의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Q. 알카이세리아 시장에서 살 만한 게 있나요?
A. 아랍풍 찻잎과 도자기 그릇, 기하학 문양이 새겨진 소품들이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관광지 기념품 가게와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곳만의 분위기 자체가 쇼핑보다 훨씬 값진 경험입니다. 가격 흥정이 가능한 가게도 있으니 여유 있게 둘러보시길 권합니다.
Q. 코르도바 로마교 근처에서 사진 찍어주는 사람이 진짜 있나요?
A. 네, 제가 직접 만났습니다. 큰 카메라를 들고 다리 위에서 여행자들을 사진 찍어주는 분인데, 약간의 기부금을 받거나 무료로 즉석에서 사진을 인화해 줍니다. 찍자마자 바로 나오는 사진이 꽤 근사했고, 코르도바의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결론
안달루시아를 다녀오고 나서 가장 많이 바뀐 생각은, 문화는 충돌보다 축적으로 더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토목, 이슬람의 기하학과 의학, 기독교의 건축이 한 도시 안에서 층층이 쌓여 지금의 안달루시아를 만들었습니다. 알함브라의 아라베스크 문양 앞에서, 코르도바 로마교 위에서, 알카이세리아 골목을 걸으며 그 사실이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납득됐습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를 계획 중이라면, 일정 중 반드시 알함브라 예약부터 먼저 잡으시길 권합니다. 나머지 일정은 그 날짜를 기준으로 맞추면 자연스럽게 완성됩니다. 800년의 시간을 담은 공간은 이틀이나 사흘로는 결코 다 볼 수 없지만, 그렇기에 또 다시 가고 싶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