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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첵랍콕 국제공항에 내리기까지 인천에서 고작 3시간 반이 걸렸습니다. 그 짧은 비행 시간이 믿기지 않을 만큼, 막상 발을 딛은 홍콩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습니다. 영화에서만 보던 빽빽한 마천루와 좁은 골목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화면으로 보던 도시가 이렇게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다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홍콩 영화 한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영화 촬영지: 거리 자체가 세트장이었다
홍콩에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센트럴(Central)이었습니다. 영국 식민지 시절 맨 처음 깃발을 꽂았던 전초기지로, 지금은 홍콩 행정과 상업의 심장부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1992년 완공 당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빌딩이었던 센트럴 플라자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그 아래로는 좁은 골목과 오래된 간판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걸어봤는데, 현대와 과거가 한 블록 안에 공존하는 풍경은 사진으로는 절대 담을 수 없는 밀도가 있었습니다.
센트럴 뒤쪽 소호(SOHO) 거리는 영국 이민자들이 가장 먼저 상륙했던 구시가지입니다. 여기서 홍콩 누아르(Hong Kong Noir)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홍콩 누아르란 1980년대에 홍콩 영화계가 갱스터물, 느와르 장르를 중심으로 쏟아낸 일련의 작품군을 가리키는데, 이 10년 동안 홍콩 영화 시장은 거의 열 배 규모로 성장하며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출처: 홍콩 필름 아카이브). 그 배경이 바로 이 골목들이었다는 사실을 직접 걸으며 실감했습니다.
소호 거리에는 치파오(旗袍) 전문 양장점이 지금도 영업 중이었습니다. 치파오란 중국 전통 여성 의복으로, 왕가위 감독의 2000년작 화양연화(花樣年華)에서 장만옥이 입었던 바로 그 옷입니다. 양장점 주인에게 물어보니 실제로 그 영화의 의상 일부가 이 골목에서 제작됐다고 했습니다. 영화 속 한 장면이 현실의 골목과 겹쳐지는 순간, 저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 센트럴(Central): 홍콩 행정·상업의 중심지, 식민지 시대 최초 거점
- 소호(SOHO): 영국 이민자 상륙지, 현재는 벽화 골목과 맛집 밀집 지역
- 만모 사원(Man Mo Temple): 1863년 건립, 2010년 홍콩 역사 기념물 지정
- 화양연화 치파오 양장점: 소호 골목 내 위치, 영화 의상 제작지로 알려짐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중경삼림의 그 장면
센트럴 뒷골목을 빠져나오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Mid-Levels Escalator)가 나타납니다. 1994년 완공된 이 에스컬레이터는 전체 길이 약 800m로, 세계에서 가장 긴 야외 에스컬레이터 시스템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언덕 위 주거 지역 주민들이 출퇴근할 때 걸어 올라가는 대신 타고 올라가도록 설계한 교통 인프라입니다. 1㎢당 약 6,300명이 거주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 밀도(출처: 홍콩 통계청)가 이런 발상을 낳은 셈입니다.
제가 직접 타봤는데, 에스컬레이터 양옆으로 카페와 식당, 갤러리가 줄지어 있어서 그냥 이동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거리 문화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중간중간 도로와 연결되어 원하는 층에서 바로 내릴 수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효율성과 편의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홍콩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더 유명해진 건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重慶森林, 1994) 때문입니다. 여주인공이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양조위를 몰래 훔쳐보는 장면, 그 장면을 촬영한 바로 그 위치에 서봤습니다. 그때 느낀 건, 영화가 이 공간의 공기를 얼마나 정확하게 담아냈는지였습니다. 현실의 골목과 영화 속 감성 사이에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빅토리아 피크에서 본 홍콩, 그리고 트램
홍콩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곳이 빅토리아 피크(Victoria Peak)입니다. 홍콩 섬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올라서면 빽빽한 마천루들이 발아래로 펼쳐지고, 맑은 날에는 중국 내륙까지 시야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는 하늘이 완전히 맑지는 않았지만, 그 장관은 충분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여행자가 "마인드 블로잉(mind-blowing)"이라고 했는데,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홍콩 트램(Hong Kong Tramways)을 탔습니다. 1904년 개통된 이 트램은 처음에는 1층 전차였다가 수요 증가로 2층 전차로 진화했습니다. 옥토퍼스 카드(Octopus Card)를 사용하면 트램은 물론 지하철, 버스, 식당까지 한 장으로 결제가 가능한데, 카드 보증금 포함해 200 홍콩달러면 충전해서 쓸 수 있습니다. 옥토퍼스 카드란 홍콩의 교통·생활 결제를 통합한 선불 스마트 카드로, 서울의 교통카드와 비슷하지만 활용 범위가 훨씬 넓습니다.
트램을 타고 이동하다 익청 빌딩(Yick Cheong Building)을 지나쳤습니다. 영화 트랜스포머 촬영지로도 알려진 이곳은 1970년대 당시 주상 복합(주거와 상업이 결합된 복합 건물) 모델의 선구자였습니다. 지금은 많이 낡았지만, ㄷ자 형태로 빽빽하게 들어찬 그 독특한 구조는 높은 인구 밀도와 비싼 땅값이 만들어낸 홍콩만의 건축 언어였습니다. 서양 영화 제작자들이 이 건물에 매료됐던 이유를, 직접 앞에 서보니 바로 이해가 됐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홍콩 여행에서 중경삼림 촬영지를 꼭 찾아가야 하나요?
A. 홍콩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강력히 추천합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자체가 센트럴에서 소호 골목으로 이동하는 실제 교통 수단이기 때문에, 촬영지를 찾아간다기보다 그냥 이동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장면 속에 서게 됩니다. 영화를 미리 보고 가면 그 재미가 훨씬 배가됩니다.
Q. 홍콩 트램 요금은 얼마인가요? 옥토퍼스 카드로 탈 수 있나요?
A. 홍콩 트램은 성인 기준 요금이 매우 저렴한 편이며, 옥토퍼스 카드로 탑승이 가능합니다. 옥토퍼스 카드는 보증금 포함 200 홍콩달러로 시작하며, 교통뿐 아니라 편의점과 식당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 현금 없이 여행하기에 편리합니다. 제 경험상 홍콩 도착 직후 공항에서 바로 구입해두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Q. 빅토리아 피크 야경이 유명한데, 낮에 가도 볼 만한가요?
A. 낮에도 충분히 장관입니다. 맑은 날 낮 풍경은 홍콩 섬 전체와 구룡 반도까지 한눈에 들어오고, 날씨가 좋으면 중국 내륙까지 보인다고 합니다. 다만 100만 불짜리 야경으로 불리는 홍콩의 밤 스카이라인을 보려면 해 질 무렵 다시 올라가거나 저녁 시간대에 맞춰 방문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Q. 홍콩 소호 골목 밀크티와 프렌치 토스트, 어디서 먹어야 하나요?
A. 소호 뒷골목 곳곳에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오래된 찻집(茶餐廳, 차찬텡)이 있습니다. 홍콩 밀크티는 끓인 실론 홍차에 무가당 연유를 넣어 만드는 음료로, 일반 카페 밀크티와는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프렌치 토스트는 영국식 재료를 광둥(廣東)식으로 재해석한 음식인데, 제가 직접 먹어봤을 때 기름기 있게 구운 식빵의 달콤한 맛이 예상보다 훨씬 중독성이 강했습니다.
결론
이번 홍콩 여행을 통해 제가 배운 건 하나입니다. 영화는 그 도시의 공기를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중경삼림의 에스컬레이터도, 화양연화의 치파오 골목도, 트랜스포머가 반한 익청 빌딩도, 홍콩이라는 도시 자체가 아니었다면 존재할 수 없는 장면들이었습니다.
홍콩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여행 전에 대표작 한두 편을 꼭 보고 가시길 권합니다. 저처럼 그냥 걷다가 "이 골목 어디서 봤는데?" 하는 순간이 여행 내내 반복될 테고, 그때마다 홍콩이라는 도시가 조금씩 더 깊이 읽히기 시작할 겁니다. 과거와 현재가 한 골목 안에서 공존하는 홍콩, 한 번만 가서는 아쉬운 도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