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슬로베니아를 '이탈리아 가는 길에 잠깐 들르는 나라'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는 피란의 첫 골목을 걷는 순간 바로 깨달았습니다. 국토의 60%가 숲인 나라, 알프스와 아드리아해가 한 나라 안에 공존하는 나라. 이 작은 나라가 왜 '유럽의 숨은 보석'으로 불리는지, 제가 직접 발로 확인한 내용을 정리했습니다.중세도시 피란, 이탈리아보다 이탈리아 같은 곳베니스에서 육로로 슬로베니아 피란에 들어서는 순간, 저는 잠깐 내비게이션을 의심했습니다. 분명 국경을 넘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붉은 지붕과 종탑, 광장의 풍경이 방금 떠나온 이탈리아와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피란이 '아드리아해의 작은 베네치아'로 불리는 데는 명확한 역사적 근거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수백 년간 베..
800년. 이슬람 왕조가 스페인 땅을 지배한 시간입니다. 처음 이 숫자를 들었을 때 솔직히 실감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직접 안달루시아 땅을 밟아보니, 그 800년이 골목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유럽인 줄 알고 갔다가, 어느 순간 중동 어딘가에 서 있는 기분이 드는 곳. 그게 스페인 안달루시아였습니다.알카이세리아 — 비단과 향신료가 오가던 이슬람 시장의 뒷골목인천에서 13시간을 날아 마드리드에 내린 뒤 다시 7시간을 차로 달렸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그라나다였는데, 시차에 찌든 몸을 이끌고 처음 찾아간 곳이 도심 안쪽 골목에 자리한 알카이세리아(Alcaicería)였습니다. 여기서 알카이세리아란, 알 안달루스 시대에 조성된 이슬람식 전통 시장을 가리키는 말로, 현재 스페인에 남아 ..
홍콩 첵랍콕 국제공항에 내리기까지 인천에서 고작 3시간 반이 걸렸습니다. 그 짧은 비행 시간이 믿기지 않을 만큼, 막상 발을 딛은 홍콩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습니다. 영화에서만 보던 빽빽한 마천루와 좁은 골목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화면으로 보던 도시가 이렇게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다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홍콩 영화 한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영화 촬영지: 거리 자체가 세트장이었다홍콩에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센트럴(Central)이었습니다. 영국 식민지 시절 맨 처음 깃발을 꽂았던 전초기지로, 지금은 홍콩 행정과 상업의 심장부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1992년 완공 당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빌딩이었던 센트럴 플라자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다크 심리학' 관련 책을 집어 든 적이 있습니다. 표지에 적힌 "이 기술을 알면 더 이상 당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솔직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읽으면서 점점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방어법을 가르치는 건지, 아니면 조종법을 가르치는 건지 경계가 흐릿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책이 한국에서 이렇게까지 화제가 된 이유,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정말 써먹을 수 있는 것인지 직접 따져봤습니다.인간관계가 왜 이렇게 무서워졌을까30대 중후반이 되면서 저도 느끼는 게 있습니다. 20대엔 사람이 그냥 좋았는데, 지금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어딘가 한 번 더 확인하게 됩니다. "이 사람 믿어도 되나?" 하는 질문이 자동으로 켜지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변화를 성숙..
퇴근하고 나서도 머릿속이 비워지질 않는 날이 있습니다. 딱히 큰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냥 하루를 버텼다는 느낌만 남는 그런 날이요. 그런 밤에 우연히 펼쳐 든 책이 한로로의 소설 《자몽살구클럽》이었습니다. '자살 클럽'이라는 부제가 붙은 중학생들의 이야기인데, 읽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이게 청소년 소설인데, 왜 제 이야기처럼 느껴졌을까요.책임감에 짓눌린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소설 속 하태수는 겉으로 보면 완벽한 아이입니다. 정교회장, 밝고 쾌활한 성격,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를 가장 성심껏 들어주는 어른스러운 태도. 그런데 정작 자신의 아픔은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합니다. 어머니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이 소설 중간에 스치듯 드러날 뿐이죠. 마음 밖으로 흘려보내지 못한 감정이 결국 그를..